“한국어 하면 ‘세종학당’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들렸으면”
세종학당재단 전우용 이사장이 지난 4월 9일 취임해 공식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평생 역사를 공부했고 대중과 격의 없이 소통해 온 그의 이름 앞에는 여러 수식어가 붙었지만, 세평과 무관하게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단어는 ‘한글’이었습니다. 10년 전 간송미술관 소장품 전시회에 갔다가 『훈민정음 해례본』 앞에서 왈칵 눈물을 쏟았던 사람. 취임 일성으로 거창한 포부 대신 전 세계에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알리는 데에 앞장서 온 재단 직원들을 열과 성을 다해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취임 직후 기관 현안을 챙기느라 쉴 틈 없이 달려왔기에, 건조한 인터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기우였습니다. 지난 4월 15일 서울 서초구 세종학당재단 집무실에서 마주 앉아 나눈 이야기를 전합니다.
Q. 취임 당일 직원들에게 “세종학당재단 막내 전우용입니다”라고 소개하셨습니다.
A. 세종학당재단의 신입 직원으로 받아들여 주십사 부탁을 드렸던 겁니다. 신입과 막내는 서툰 사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가족은 아니지만 같은 곳을 보고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니 서로 배우고 서로 가르치는 마음으로 사이좋게 어울리자는 뜻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Q. 조직 내부를 넘어 세종학당 교실에서도 견지해야 할 가치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A. 전 세계 사람들이 세종학당과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그들이 처한 환경이 어떻든 우리는 그들과 ‘인류 보편의 꿈’을 나누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1, 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딛고 시작한 현대사는 국가간 주권평등과 개인간 인권평등이라는 대원칙을 실현하기 위한 분투의 과정이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은 인종, 종교, 성별, 재산, 정치적 신념, 사회적 배경 등 그 어떤 이유로도 인간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습니다. 과거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은 제국주의 침략전쟁과 대량 학살의 배후에 있던 ‘차별주의’를 배격하는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반제국주의, 반패권주의에 기초한 현대 한국문화는 평화로운 세계를 향한 인류의 꿈을 선도할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봅니다. 전 세계의 세종학당은 바로 ‘문화적 어울림과 나눔’의 모범을 보이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 한국에 슈퍼맨·아이언맨 같은 히어로가 없는 이유
Q. 최근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류 역사는 커다란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A. 여행이나 쇼핑할 때는 휴대전화로 인공지능 번역기만 돌리면 어느 언어로든 쉽게 소통할 수 있어요. 그런데도 많은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단순한 의사소통을 넘어 한국문화 전체와 접촉하려는 의지를 가졌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 접촉이 일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어의 세계화와 세계 보편 개념의 한국화가 동시적으로, 쌍방향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는 시구에서 ‘즈려밟고’라는 단어를 인공지능은 어떻게 번역할까요? 쌍방향의 접촉 과정에서 인공지능도 계속 고도화할 테고, 어쩌면 새로운 단어들을 창조할지도 모릅니다. 세종학당은 이 접촉면을 확장하면서 한국문화와 세계 보편문화의 수준을 함께 높이는 방안을 계속 고민해야 합니다.
Q. 문명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한국어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A. 거의 모든 포유류가 입으로 소리를 내지만 입술 닿는 소리 즉 순음(ㅁ, ㅂ, ㅃ, ㅍ)은 인간만이 낼 수 있다고 해요. 아기가 ‘엄마’나 ‘맘마’처럼 ‘ㅁ’ 계열의 소리를 처음 낼 때 비로소 말을 한다고 하잖아요. 그전까지 내는 소리는 따로 옹알이라고 하지요. 엄마 다음이 ‘아빠’나 ‘파파’인 것도 세계 공통이에요. 그런데 한국어에는 마음, 몸, 말, 물, 불, 빛, 볕, 바람 등 원초적 중요성을 담은 단어들이 특히 순음 계열에 많이 모여 있어요. 순음 계열에 있는 한국어 단어들만 배워도 한국문화가 무엇을 중시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요. 저는 한국어에 담긴 가치의 핵심이 ‘생명과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특징을 들자면 한국어는 관계 중심의 언어라는 점입니다. 외국인 학습자가 한국어에서 2인칭은 ‘너’라고만 배웠다면 실제 대화에서 낭패를 보기 쉽습니다. 한국인들은 상대의 신원을 특정한 뒤에야 말을 걸 수 있어요. 그래서 ‘너’가 아니라 선생님, 사장님, 사모님, 심지어 이모님이나 고객님이 ‘2인칭’으로 쓰이는 거죠. 어떤 면에서는 ‘신분제 시대의 잔재’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면을 보자면, ‘상대를 배려하는 언어’라고 할 수도 있겠죠.
Q.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적 층위를 하나씩 이해해 가는 과정일 수도 있겠군요.
A. 언어를 ‘의사소통 수단’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생각도 말로 하잖아요. 그러니 언어는 의사(意思) 그 자체예요. 인간의 사상과 감성 모두가 언어에 담기고 언어로 표현되는 법이죠. 그러니 언어의 교수와 학습 자체가 문화 교류 과정이 될 수밖에 없어요. 예컨대 저는 영어를 배우면서 윌리엄 셰익스피어, 마크 트웨인, 에이브러햄 링컨, 존 F. 케네디 등을 함께 배웠어요. 영국과 미국의 역사, 문화, 위인들은 영어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향후 한국어 보급이 어떤 ‘한국적인 것’들과 결합해야 하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Q. 요즘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유행을 넘어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A. 얼마 전 방탄소년단의 신곡 에일리언스(Aliens)에 ‘김구 선생님 텔 미 하우 유 필(지금 기분이 어떠신가요)’라는 가사가 실렸죠. 저는 ‘김구 선생님, 당신의 소원이 이뤄졌어요’라는 뜻으로 들었어요. 김구 선생은 「나의 소원」에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고 즐겁게 살길 원할 뿐이다’라고 쓰셨죠. 우리 문화에는 제국주의 코드가 없어요. 한국어로 된 문화 콘텐츠들에는 자국 국적의 슈퍼 히어로가 전 인류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식의 서사가 없잖아요.
Q. 그러한 가치관이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봐야 할까요?
A. 그렇다고 봅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였다가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합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청산, 즉 ‘탈식민’은 현대 인류의 보편 과제입니다. 한국인들은 이 과제를 가장 앞장서서, 가장 모범적으로 수행해 왔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을 ‘도달해야 할 모범’으로 삼아 왔지만, 근래에는 수많은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모범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한국인들에게 부과된 세계사적 책무가 커졌다고 할 수 있겠죠. 세계인들에게 한국어를 보급하는 일은 가치관의 교류일 수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한국인들의 가치관을 압축해 표현한 ‘대한민국 헌법정신’도 당연히 교류와 공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Q. 헌법정신이 포함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제가 한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들여다보는 것이 그 나라의 헌법입니다. 헌법에 전문을 둔 나라들의 경우, 여기에는 그 나라 국민들이 함께 지향해야 할 가치, 함께 지켜야 할 덕목들이 담깁니다. 프랑스 헌법에 나온 자유, 평등, 우애는 프랑스인 공동체가 맺은 약속입니다. 우리 헌법 전문에는 무엇이 등장할까요? 바로 정의, 인도, 동포애입니다. 한국인들이 합의한 국가 공동체의 가치가 이 세 가지로 표현된 것이죠.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언제나 ‘힘이 아니라 정의’가 규율하는 세계를 꿈꿨고, 3·1운동 때 우리 선조들은 독립선언서 공약 3장 첫 번째에 이 운동이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한 민족적 요구로 일어났다고 밝혔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정의, 인도,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한다’고 명시한 것도 이 정신을 계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탈식민의 가치’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정신을 세계인과 공유할 수 있는 이유이죠.
Q. 외국인들의 한국문화 소비가 대중문화라는 특정 장르에만 비대칭적으로 쏠려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A. 세계인은 한국의 민주주의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민주화 운동도 전 세계적 현상이라서 각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에겐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 주된 관심사예요. 그런데 한국 정치나 사회에 관한 정보가 주로 영어로 전달되기 때문에 일부 왜곡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세종학당재단이 하는 일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 사회현상 전반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외국인들에게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Q. 한국문화를 더 넓은 범주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A. 한국문화 역시 역사 속에서 변해 왔습니다. 현대 한국인들에게조차 익숙하지 않은 ‘화석화한 문화’가 아니라 ‘살아 있는 문화’는 지금도 변화 도상에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보급, 전파한다는 생각에서 ‘공유’한다는 생각으로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스페인의 역사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는 ‘인간에게 본성이란 없다. 그에겐 오직 역사가 있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국민성이니 민족성이니 하는 것은 생물학적, 유전적 특질이 아니라 공동의 역사적 경험에서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한국어를 통해 다른 나라 사람들과 ‘문화 공유 기반’을 확장한다는 생각으로 이 일을 추진한다면, 분명 ‘서로 어울리는 세계’를 만드는 데 공헌할 수 있을 겁니다.
◇ 내년 재단 출범 15주년···새 청사진은
Q. 재단은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가야할까요?
A. 궁극적으로는 현대 한국어에 담겨 있는 탈식민의 가치를 전 세계인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 교재에 이러한 가치관을 잘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어 교재에서 자민족 우월주의나 패권주의가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거고요.
Q. 새로운 도약을 위해 필요한 단계적 과제가 궁금합니다.
A. 첫째로 직원들이 일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 직원들이 자기 일에 문명사적 자부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직원들의 말을 많이 듣고 필요하다면 토론도 자주 해야겠죠.
두 번째는 세종학당이 ‘평화의 실천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평화(平和)의 반대말은 사실 전쟁이 아니라 차별이에요. 높낮이 차이가 없는 것이 평(平), 서로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어울리는 것이 화(和)이니까요. 전 세계 세종학당 교원과 직원, 학습자들이 서로 편견과 차별 없이 평등하게 어울리는 문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세 번째는 연결입니다. 전 세계 세종학당 가족을 연결하는 플랫폼을 만들고 그 안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눴으면 합니다.
Q. 마지막으로 임기 중에 꼭 이루고 싶은 점이 있으시다면?
A. 세종학당의 브랜드 평판을 끌어올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나라가 세계 도처에서 자국어 교육기관을 설치,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그 모두가 상호 비교 대상이에요. 물론 세종학당의 노력만으로 ‘비교우위’를 확보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에 대한 평판이 그 언어에 대한 평판이 되고, 다시 그 언어 교육기관에 대한 평판이 되는 거죠. 세종학당 교원과 직원들이 ‘배려와 어울림’을 앞장서 실천하면, 세종학당과 대한민국의 평판을 함께 높일 수 있을 겁니다. 세종학당이 세계 어디에서나 가장 친근한 한국어 교육기관이자 외국어 교육기관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국을 생각할 때, ‘세종학당(King Sejong Institute)’이라는 이름을 함께 떠올리는 외국인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