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학당 한국어교원 해외 파견 생활기
잿빛 하늘 아래 피어나는
코발트 블루의 꿈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인근의 중앙아시아 거리는 다문화의 활기가 넘치는 명소입니다. 세종학당 파견교원으로 선발된 후 환송회를 위해 찾은 ‘스타 사마르칸트’ 식당은 내외국인 손님들로 북적였습니다. 숯불에 구운 양고기인 샤슬릭과 신선한 토마토 샐러드를 곁들이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중, 우연히 우즈베키스탄 나망간 출신의 청년 사르파르벡을 만났습니다. 세종학당에서 공부했다며 밝게 인사하는 그의 모습에 반가움과 묘한 설렘이 교차했습니다. 곧 제가 향할 임지인 나망간이 한층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실크로드의 진주이자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로 기억되는 곳입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담긴 순례의 여정부터 알렉산더와 칭기즈칸, 아미르 티무르와 바부르의 발자취까지, 오랜 역사의 흔적이 겹겹이 쌓인 땅이기도 합니다. 이제 저는 이곳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새로운 인연을 맺으려 합니다. 한국을 이토록 가깝게 느끼는 이들에게 이제는 우리가 한 발 더 다가갈 차례입니다. 현지인들이 자주 쓰는 정겨운 인사를 마음속으로 되새겨 봅니다.
“야흐시, 라흐맛!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망간 세종학당 옆 전쟁기념 공원 ‘모탐사로 오나(Motamsaro Ona)’에서 만난 학생들
꽃축제가 열린다는 나망간에 도착했을 때, 처음 마주한 거리에는 오래된 오아시스 도시 특유의 잿빛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도심을 걷는 학생들의 표정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생기로 반짝였습니다. 곳곳에 자리한 다양한 교육기관에서도 배움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수업이 시작되자 학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학구열로 뜨거웠던 1970~1980년대 한국 사회의 역동성과 희망이 떠올랐습니다. 도시의 잿빛 분위기와 대비되는 학생들의 반짝이는 코발트빛 눈빛은 제 안에 새로운 의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곳 청년들에게 한국어는 단순한 외국어 그 이상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양질의 일자리를 얻기 위한 삶의 디딤돌이며,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학문을 탐구하고 대학 전임 교원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필생의 도전입니다. 이들은 더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세상을 넓히기 위해 한국어 학습에 매진합니다. 그만큼 배움을 대하는 눈빛도 진지하고 결연합니다. 학생들의 강렬한 눈빛은 도시 곳곳에 자리한 모스크 지붕의 코발트색만큼이나 깊고 선명합니다.
제가 부임한 나망간 세종학당은 현지교원 3명과 파견교원 6명이 함께 이끌어 가는 대형 학당입니다. 이곳에서도 지역의 뜨거운 학구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4학기제로 운영되는 학당의 9월은 성취도 평가와 진단 평가가 맞물려 무척 분주합니다.
지난 9월 16일 나망간 세종학당에서 성취도 평가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시험 감독을 맡아 들어간 교실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옆 친구의 답안지로 자꾸 눈길을 보내는 학생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습니다. 애타게 목을 빼고 눈을 굴려 보던 학생도 감독관의 단호한 시선 앞에서는 그 시도를 멈췄습니다. 낯선 교실에서 마주한 이런 장면도 초임 교원의 일상에 하나둘 쌓여 갑니다.
하반기에 함께 첫발을 내디딘 동기 교원 4명은 낯선 타지 생활의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여러곳을 살펴보고 고민한 끝에 신축 아파트가 있는 압소나(Afsona) 지역에 거처를 정하며 나망간 생활의 첫 단추를 끼웠습니다.
배낭여행과 캠핑으로 적응력을 다져 왔지만, 타국에서 보낼 2년은 또 다른 도전입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듯 마음가짐을 다잡고 힘차게 신발 끈을 조여 맸습니다. 새로 장만한 카메라로 학생들과 함께 성장하는 눈부신 순간들을 꼼꼼히 기록하고 싶습니다.
나망간 사르도바 시장(Sardoba Bozori)의 풍경
이 오래된 도시에서 저는 한국과 한국어를 통해 학생들의 미래를 여는 ‘레인메이커(Rainmaker)’가 되고 싶습니다.
대학 시절 한국사를 전공하며 경주에서 마주했던 신라 원성왕릉의 무인상이 떠오릅니다. 서역인의 모습을 한 그 무인상과 신라 무덤 속 환두대도, 향가 「처용가」에서 먼 지역과의 교류 흔적을 찾아보던 기억도 되살아납니다. 당시 관심을 기울였던 오랜 교류의 역사가 이제 교육 현장에서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지는 듯합니다. 실크로드의 역사를 품은 이 땅에서 중앙아시아의 청년들은 다시 세계 무대로 도약하려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저는 20년 넘게 교육 출판업계에 몸담았고, 지난해 가을에는 안디잔에서 예비 교원 실습을 했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마침내 정식 교원으로 서게 된 지금, 남다른 책임감을 느낍니다. 학생들의 선한 눈빛에 담긴 열정은 제 안의 도전 의식을 일깨웁니다.
지난 9월 22일 신입 교원을 환영하기 위해 진행한 나망간 세종학당 관계자들의 회식 모습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익힌 언어 감각을 수업에 살리고, 한국의 다채로운 문화도 폭넓게 전하고 싶습니다. 평소 즐겨 연주하는 통기타 선율에 한국어 노래와 챈트(Chant)를 실어 학생들과 함께해 보려 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기보다 메마른 땅에 물길을 내듯, 학생들의 배움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그 작은 노력이 학생들이 꿈을 향해 나아가는 데 마중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좌충우돌 우당탕탕, 세종학당 초임 교원의 우즈베키스탄 나망간 적응기가 이제 막을 올렸습니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글. 우즈베키스탄 나망간 세종학당 이성원 교원
새롭게 선보이는 ‘세종학당 한국어교원 해외 파견 생활기’
이번 호부터 새롭게 선보이는 ‘세종학당 한국어교원 해외 파견 생활기’는 세계 각지의 세종학당에서 활동하는 한국어교원의 시선으로 현지에서의 생생한 일상과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우즈베키스탄 나망간 세종학당 이성원 교원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앞으로 다양한 지역에서 전해오는 한국어교원들의 삶과 경험을 소개할 예정입니다.